카이스트 학생의 자살을 보며

이제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가 되었다.
특히나 '상위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자살은 이러한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다고 본다.
(계급이란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체제를 불문하고 조직과 사회에는 어떠한 형식이든 엄연히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사회 지도층, 부유층, 인기연예인, 그리고 명문대생 등.
어찌보면 일반 대중보다 사회 기득권에 한 발 더 다가선 이들이다.
물론 이 들의 자살보다 보도조차 되지 않는 '이름없는 자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더욱 힘들고 절박한 이유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 앞에 더 힘들고 더 절박한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상대적인 고통을 안고 사니까.

카이스트 학생의 자살로 돌아와서 보면, 진로의 고민이 컸다고 한다.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는(듯 보이는) 명문대생에게 진로고민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또 이것이 현실이다.
사실 진로 고민이란 누구나 하며, 또 평생 한다. 내가 어떤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다.
진로 고민이란 기본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내 삶에 대한 평생의 선택과 고민인 것이다.
본래 고민이란 것은, 선택지가 여러 개일 때 하게 된다. 선택지가 없다면, 그것은 고민이라기 보다는 '공황'상태가 된다.

탄탄대로일 것 같은 사람들에게 왜 이러한 고민 혹은 공황 상태가 오게 될까?
개인적으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더욱 정확히 말해 물질만능주의 사회 아래에서 경쟁은 더욱 가속화되고 1등만 살아남는 초적자생존의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실패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순 없다.
그러나 과거에 실패를 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았다면,
현재는 그러한 희망을 꺾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 한 번의 패배로 내가 인생에서 낙오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러한 두려움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닐까.

특히 경쟁에서 열심히 승리하며 살아온 사람일 수록, 그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더 크다.
그래서 우리는 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우리가 지는 연습을 할 여유를 많이 주지 않는다.
이른바 '사회안전망'이 약하다는 뜻이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겪고 있는 일종의 체제 한계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점점 빠르게 가속되는 소용돌이와 같다. 골은 점점 깊어지며, 한번 골에 빠지면 고착된다.
그리고 자신이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상위 계급과 점점 차이가 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기득권층이 점점 상위 1%, 상위 0.1%로 좁아지기 때문이다.

자살은 유행이 아니다.
자신의 죽음을 단지 '남이 죽기 때문에, 유명인이 죽기 때문에' 따라서 선택할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죽는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시대에서 계급을 불문하고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는,
내 인생에 대한 고민 - 즉 꿈과 비전을 빼앗아버린 사회 시스템에 기인하는 것이다.

왜 '그 사람'이 죽어야만 했는가가 포인트가 아니다.
왜 '사회'가 그로 하여금 죽음을 선택하게 했는가를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죽을 각오로 살아보지.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해서 그래. 등등.
하지만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하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완벽한 것이 아님을 알고, 이를 바꾸어가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경제학자들도 현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깨닫고 '수정자본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으로 안다.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우리는 우리의 사는 환경을 보다 인간답게, 행복하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by 갈기머리 | 2012/04/18 11:49 | Diary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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